II
트랜스젠더
인권을
말하기
1
성별
정정
성별정정의 의미
트랜스젠더가 법적인 성별과 성별정체성이 달라서 겪는 차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법적 성별을 성별정체성에 맞게 바꾸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절차를 흔히 ‘법적 성별 인정(legal gender recognition)’이라고 부릅니다. 국가가 개인의 법적 성별을 그 사람이 스스로 인식하고 정체화하는 성별에 맞게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따라 각종 공적 기록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라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성별정정’이라는 말을 씁니다. 정정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법원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가족관계등록법에는 공무원이 신생아의 나이, 성별 등의 정보를 가족관계등록부에 잘못 입력한 경우 바로잡는 등록부정정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이러한 등록부정정 제도를 트랜스젠더에게도 적용해서 성별정정을 허가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트랜스젠더가 성별정체성과 다른 법적 성별로 지정된 것이 오류라는 것입니다.
성별을 법 앞에 인정받는 것
트랜스젠더에게 성별정정은 신분증에서 드러나는 법적 성별과 자신이 인식하고 살아가는 성별이 달라서 겪는 많은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러한 어려움 중 가장 큰 것이 구직입니다. 앞서 「성별정체성과 차별」에서 본 것처럼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절반이 넘는 트랜스젠더 응답자가 구직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성별정정은 이러한 장벽을 없애줍니다.
나아가 성별정정은 한 사람이 법 앞에 자신의 성별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법 앞에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입니다. 성별정정이 되지 않을 때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신분증을 보일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줍니다. 2020년 저명한 의학전문지 랜싯 공중보건(The Lancet Public Health)에 미국 내 22,286명의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게재되었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신분증 상 성별표시가 자신의 성별정체성과 모두 일치하는 사람의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32% 가량 감소하고, ‘자살 사고’ ‘자살 계획’ 역시 22-25% 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22
22 Scheim, Ayden I., Amaya G. Perez-Brumer, and Greta R. Bauer. 2020. “Gender-Concordant Identity Documents and Mental Health Among Transgender Adults in the USA: A Cross-Sectional Study.” The Lancet Public Health 5(4).
따라서 성별의 법적 인정은 개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사회적·법적 지위를 국가가 승인하는 과정으로서 인간의 존엄과 자기결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든 개인이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입니다. 유엔의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독립전문가는 “법 앞에 동등하게 인정받을 권리는 다른 권리나 자유의 핵심원칙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성별정정에 있어 모든 강제적인 조건을 없앨 것을 권고합니다.23 이러한 원칙에 따라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독일 등은 현재 어떠한 조건도 없이 본인의 신청만으로 법적 성별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23 Independent Expert on Protection Against Violence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2018. Protection Against Violence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UN Doc. A/73/152. 2018. 7. 12. para. 80.
한국의 성별정정
한국에서는 성별정정에 대한 법률이 없고 법원의 결정으로만 이루어져 왔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부 법원에서 호적부(현재 가족관계등록부)에 적힌 성별을 정정한 결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통일된 기준이 없어 법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2006년 대법원은 처음으로 전원합의체 결정을 하면서 성별정정을 위한 통일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같은 해 이를 정리해서 대법원 예규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을 만들었습니다. 예규는 법이 아니지만 판사들이 사건을 다룰 때 참고하는 내부 지침입니다. 이후 2011년에 대법원은 한 차례 더 전원합의체 결정을 해서 추가로 기준을 마련했습니다.24
24 대법원 2011. 9. 2.자 2009스117 전원합의체 결정
이렇게 어느 정도 통일된 기준이 마련된 것은 다행이지만 그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재 대법원 판례와 예규가 제시하는 일반적인 기준은 이렇습니다:
①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며 대한민국 국적자일 것
② 성장기부터 지속적으로 성전환증으로 인한 고통과 반대 성에의 귀속감을 느껴왔을 것
③ 성전환수술을 받아 외부성기를 포함한 신체외관이 바뀌었을 것
④ 생식능력을 상실했고 재전환의 가능성이 없거나 극히 희박할 것
⑤ 현재 혼인 중이 아닐 것
⑥ 범죄나 탈법 의도로 성별정정을 신청하지 않았을 것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높은 비용이 들고 건강상의 위험을 동반하는 ‘성확정수술(성전환수술)’ 요구입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트랜스젠더가 성별정정을 원해도 하지 못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실태조사」에 따르면 ‘법적 성별 정정을 했다’는 트랜스젠더 남성은 응답자의 23.2%, 트랜스젠더 여성은 응답자의 13.3%에 불과했습니다. 법적 성별 정정을 할 의향은 있으나 아직 시도하지 않은 응답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성확정 관련 의료적 조치에 드는 비용 때문에’라는 응답이 55.6%(243명)이 가장 높았습니다.2525 홍성수 외. 2026. 앞의 보고서. 133.
다행히 몇몇 지방법원에서 외과적 수술 없이도 성별정정을 허가한 사례가 있습니다. 2021년 수원가정법원은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남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했고, 2023년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여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이 없는 이상 이러한 결정은 해당 법원에서의 예외적 사례일 뿐,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엄격한 기준이 요구됩니다.26 그렇기에 이제는 국제인권규범에 부합하는 성별정정 절차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26 한겨레. 2026. 3. 24. 「‘성별 정정’ 신청했더니 수술 받고 오라는 법원…유엔 “인권침해”」.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250763.html
※ 성별정정 절차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의 ‘성별정정 툴킷’(🔗gender-toolkit.kr)을 참조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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